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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나눔 "믿음의 시련"이 "영적강골(靈的强骨)"을 만든다. (야고보서 1: 1~4)
관리자 (tong) 조회수:52 추천수:0 125.143.145.195
2018-10-30 16:03:26
"믿음의 시련"이
영적강골(靈的强骨)을 만든다.
(야고보서 1: 1~4)
 

●저자는 누구인가?
본문을 보기 전에 간략하게 야고보서의 개론을 다루겠습니다. 저자, 독자, 기록 목적입니다.
1절을 보면 야고보서의 저자는 야고보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3명의 야고보가 등장합니다.
세베대의 아들이며 요한의 형제였던 야고보가 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순교당한 첫 번째 제자였습니다.
동명이인으로 예수님의 12제자 중에 알페오의 아들 야고보도 있었습니다. 야고보서를 기록한 저자는 예수님의 친동생이었던 야고보입니다.
마태복음 13장 55절을 보면 “이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야고보는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스스로를 메시야라 주장하는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짧은 기간 안에 예루살렘 교회 최고 지도자로 인정받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7절을 보면, “장사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였느니라”고 기록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9절에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라고 말하며, 야고보의 리더십이 베드로와 요한보다 앞서 있음을 인정합니다.

야고보가 그렇게 짧은 기간 동안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급격한 회심을 통해 의롭고 구별된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야고보를 “의로운 야고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야고보는 이 편지를 통해 성도들이 의롭고 구별된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독자는 누구인가?
야고보서의 독자는 누구입니까?
1절을 보니까,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라고 말합니다.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의미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한 이후 유대인들은 세계 전역에 흩어져서 살았습니다.
조국 예루살렘 이외의 땅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을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고 칭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야고보서는 당시 로마 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쓴 편지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참 이스라엘은 혈통적 유대인이 아니라,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그분을 따르기를 다짐하는 영적 유대인 곧 그리스도인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2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고 합니다.
흩어진 나그네는 육적 혈통의 유대인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피뿌림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구별된 삶을 살기로 결단한 모든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고 분명하게 못박고 있습니다.
 
●흩어진 12지파의 의미
그렇다면, 왜,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을 “흩어져 있는 12지파”라고 부를까요?
먼저, 구약의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열두지파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해방과 구속을 경험하고 곧바로 시내산에 도착합니다.
그곳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과 언약을 맺습니다. 출애굽기 19장 5절을 보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라고 약속하십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공동체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담겨있습니다.
출애굽의 목적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이 아니라, "전세계를 구속하는 제사장 나라로서의 사명"이었습니다.
 
●영향력은 거룩함으로부터 온다.
십계명은 영향력입니다. 거룩함이 영향력입니다.
말씀대로 율법대로 살아내는 한 민족을 통해 열방을 주께로 인도하는 영향력 있는 한 민족을 세우시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다만, 신약시대와 구약시대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구심적 선교와 원심적 선교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구약시대에서 하나님의 선교 방법론은 구심적 선교입니다.
즉, 가나안이라는 한 구별된 땅에 구별된 백성을 세우사 그들의 구별된 삶을 보고 세계와 열방이 예루살렘으로 몰려오는 구심적 선교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가 되면서, 구심적 선교에서 원심적 선교로 방법론이 바뀌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복음의 거룩한 씨앗이 되어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는 영향력 있는 디아스포라가 되라는 것입니다.
(쑥전도. 복음으로 세상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그림)
 
●삶으로 표현되는 복음의 능력이다.
결국, 교회란 무엇인가? 세상 속에 흩어지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흩어질 때 세상을 바꾸어 낼 만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실패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모든 족속을 철저히 진멸하라고 명령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가나안 땅에 살던 원주민들의 타락한 문화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세상과 철저히 구별된 민족공동체를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이라는 좁은 땅에 뭉쳐 살면서도 결국 가나안 문화에 그대로 흡수당해 버립니다.
그렇다면 세상 속으로 흩어져서 들어가야 할 이 시대의 교회는 어떻게 사탄의 문화가 지배하는 이 위협적인 세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영적 심장 판막증
심장판막증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심장판막은 피가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고 역류하지 못하도록 도와주는 얇은 막을 의미합니다.
심장판막증이란 심장판막에 이상이 생기면서 피가 역류하는 증상을 말합니다. 영적으로 볼 때 교회가 심장 판막증에 걸려 있습니다.
교회가 깨끗한 영향력을 세상에 흘러보내야 하는데, 역류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더러운 영향력이 교회 안에 흘러 들어오면서 교회가 세속화되는 것입니다.
왜요? 믿음이라는 영적 판막에 이상이 생겨서 세상에 영향력이 흘러가지 않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믿음이라는 영적 판막을 치료해보자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기록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사명을 감당하는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이 지식이나 말이 아니라, 삶의 능력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야고보는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시련과 믿음
그래서, 야고보는 인사말을 한 후에 2-4절에서 가장 먼저 시련과 믿음의 문제를 말합니다.
오늘 제목은 ‘믿음의 시련이 영적 강골을 만든다’라고 잡았습니다.
강골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보니까 ‘단단하고 굽히지 않는 기질’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교회의 승패가 믿음의 질에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믿음에는 구원얻는 믿음과 승리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구원 얻는 믿음은 단순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오른편 강도가 했던 한마디 "오늘 주의 나라에서 나를 기억하옵소서” 그 한마디로 강도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강도의 믿음은 구원은 받았지만 세상을 바꾸어내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우리가 구원 얻는 믿음을 가졌다면 이제는 단련된 믿음, 강한 믿음, 세상을 바꾸어내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원 얻는 믿음에서 세상을 바꾸는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바로, 시험과 시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고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언약을 세운 후에, 곧바로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무려 40년의 시간을 광야에서 시련의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단련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진짜 제자훈련이 무엇인지 아세요?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이라는 학교에서 받는 훈련이 진짜 훈련입니다.
물론, 그 시련의 현장을 통과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성경공부를 하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성경의 지식과 믿음을 고난이 가득한 삶의 현장에서 적용할 때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삶의 현장에서 경험하는 시련과 시험을 통해서만, 구원하는 믿음에서 승리하는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결국 믿음이란, 
내 인생에 다가오는 시련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시험이 가득한 인생의 한 가운데서 어떻게 강골과 같은 강한 믿음, 세상을 바꾸는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3가지 스텝에 대해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선명한 목적을 붙들어야' 합니다.
 
2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통과한 것처럼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도 광야를 통과하게 하십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오늘 본문처럼 다양한 시험이 기다리는 곳입니다.
오늘 본문은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합니다.
영어 성경은 ‘consider it all joy’ 시련과 고난과 문제와 유혹이 다가올 때 진짜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한 이유는 광야에서 다양한 시험에 직면할 때마다 기뻐하기 보다는 불평하고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시험과 문제 앞에서 불평과 낙심의 감정이 찾아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광야 이스라엘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여러가지 시험 앞에서 진짜 기뻐할 수 있을까요?
 
첫번째는,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분명하게 알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성공을 꿈꾸지만 하나님은 성숙을 꿈꿉니다.
우리는 인생의 목적이 성공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생의 목적이 성공이 아니라 성숙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공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 인생에 시험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실패, 좌절, 질병, 갈등, 고난을 주시나요? 4절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시험이 온전한 인격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성공을 최고의 가치, 최고의 목적을 삼고 인생을 살면 시험이 다가올 때 결코 기뻐할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붙들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공이 아니라 성숙을 주시는 분이고 성숙을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시련과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시련과 시험이 항상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숙을 꿈꾸는 사람들은 인생의 다양한 시련들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욥이 극심한 고난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의 가는 길은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아가리라”
욥이 꿈꾸웠던 인생의 목적은 정금과 같은 환경, 정금과 같은 평안함이 아니었습니다.
정금과 같은 인격이었습니다.
주님이 이 고난을 통해 나를 단련하시면 내가 정금과 같은 인격으로 주 앞에 설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난하고 힘들어도, 여러분이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조금이라도 더 닮아간다면,
주님 없는 세상의 부요함과 평강을 누리는 것보다, 여러분의 인생이 더 위대한 인생 더 성공적인 인생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자, 그렇다면, 왜, 시험과 시련이 우리를 온전한 인격으로 변화시킬까요?
시련을 통과하는 믿음만이 인내라는 인격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인내의 중요성'입니다.
3절입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앎이라”라고 합니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라는 위대한 성품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3절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말합니다.
환난이 인내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6-7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마지막날 주님께 칭찬받는 믿음은 시험을 통과하여 불로 연단되어진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결정적인 특징은 인내라는 성품 속에서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왜, 인내가 중요할까요?
믿음과 인내의 관계성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본문이 누가복음 18장 1-8절에 등장하는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비유의 서론과 결론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이 비유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것”을 교훈하기 위해 이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비유의 결론이 무엇입니가?
8절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십니다.
서론과 결론을 잘 묵상해보면 성도가 이 세상을 살면서 겪는 어려움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을 끝까지 지킬 수 없어 낙심할 수 밖에 없는 힘들고 답답한 현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굳이 불의한 재판장을 등장시킬까요?
성도가 세상에서 직면하는 현실이 바로 불의한 재판장과 같기 때문입니다.
악이 득세하고, 정의는 땅에 밟히고, 하나님의 통치의 흔적을 잘 발견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믿음으로 살면 오히려 고난을 받고 욕심과 탐욕으로 사는 사람들이 득세하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진짜 믿음은 무엇일까요? 눈에 보이고 느껴지고 경험되는 어떤 것들이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이 하나 없어도 험악한 현실을 믿음으로 견디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세상과 내가 딪고 서 있는 땅이 너무 다를 때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것은 인내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 비유의 결론 8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과 달리 우리의 기도에 속히 응답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실까요?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이 우리가 기대하는 응답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은 환경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변화되지 않는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견디며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기도해서 상황이 변하지 않고, 환경이 바뀌지 않으면 믿음을 포기합니다. 기도를 중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시대 다니엘과 같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다니엘은 왕의 어인이 찍힌 것을 알면서도 하루 세번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이 기도를 계속했을 때 상황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눈에 보이는 현실 때문에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며, 믿음으로 사자굴에 들어가는 자리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 강골 같은 믿음이 사자들의 입을 막았고, 다리오 왕의 권세를 꺽어 하나님의 발 앞에 굴복하게 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시련에 대한 바른 반응'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시련 앞에 직면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오해하면 마치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험과 시련이 믿음에 인내를 만들어 온전한 사람으로 우리를 만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시련은 항상 2가지 길로 인도합니다.
시련은 우리의 인격을 철저히 파괴시키고, 믿음에서 파선시키기도 합니다. 반면, 시련은 우리의 믿음을 단련하여 인격을 완성시킵니다.
야고보는 후자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해야 할 2가지를 명령합니다.
 
첫째는, 온전히 기쁘게 여기는 것이며, 두번째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것은 일부러 감정을 조작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혹은, 피상적이고 긍정적인 심리학으로 받아들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라는 것은 evaluate 평가하라는 의미입니다.
아는 것과 평가하는 것이 다릅니다. 아는 것은 객관적 사실입니다. 정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통제하시고 시련을 주시며, 그 시련을 통해 나를 단련하여 온전한 사람을 만드신다는 것은 하나의 정보이며 사실입니다.
믿음이란, 그것을 단지 아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성경의 이 진술이 단지 지식이 아니라 내 삶의 진정한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울도 로마서 6장 11절에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찌어다”고 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여전히 죄에 대하여 죽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범죄하며 넘어집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진짜 현실임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이 시험이 나를 죽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현실은 이 시험이 결국 나를 위대한 인생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도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인생에 고난이 올 때 정말 저에게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사람이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능히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케 하시느니라.
그리고, 인내를 온전히 완성해야 합니다.
한번의 인내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인내를 완성해야 합니다.
인내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그 자리에 머물러 서서 온 몸으로 시련을 받아내야 합니다.
고난 속에서 인내를 가지고 그 인내를 완성함으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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